인문 서적과 인문학 관련 잡설 life
2010.01.20 21:41 Edit
파시즘
인문서적은 언제나 첫 부분이 읽기 힘들다. 대체로 첫 부분에는, 전체 내용의 개괄과 집필 동기 · 배경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. 본 경기에 앞선 준비 운동. 그리고 이 부분에서 책을 통틀어 가장 많은 개념과 정의가 쏟아져 나온다. 본격적인 내용을 시작하기 전에, 해당 학문에서 이 주제가 차지하는 위치와 저작자의 연구 당위성을 설명하자면, 당연히 여러 가지 용어와 지식을 끌어와야 하기 때문이다. 그리고 이는 그대로 나 같은 얼치기 독자에게 거대한 장벽이 된다.
정말이다. 요즘 로버트 O. 팩스턴의 <파시즘>을 읽으며 나의 무식을 통감하고 있다. 난 스스로가 그래도 인문학적 소양이 빵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 착각이었어... 특히 용어 정의를 외우지 못하는 나에게 '이데올로기' '이즘'이 난무하는 1장은 좌절의 연속을 맛보게 했다. 그래서 이렇게 어려운 책에 내가 생각없이 도전했구나 했는데, 돌이켜보니 비단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니었다.
<나치 시대의 일상사>를 읽을 때도 그랬다. <파시즘>처럼 힘들지는 않았지만, 알 듯 모를 듯한 문장을 내 것으로 소화하려고 머리를 쥐어싸고 무던히도 애썼지. 마치 교수님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끙끙거렸던 대학 때 같았다.
그렇지만 뒤로 갈수록 이해하기가 쉬웠고, 중반 즈음 부터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. 좋은 책이었다. 훌륭하게 균형잡힌 저자의 시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. 첫 부분에서 헤매었을 때 그냥 포기하지 않기를 참 잘했지.
다행히 <파시즘>도 '파시즘'에 집중하는 2장부터는 오히려 한결 읽기 수월하다. 완독하고 난 후에도 용어 정의는 머리 속에 남아있을 것 같지 않지만, 그래도 큰 흐름을 잡고 내 견해와 시각을 결정하기에는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. 어서 읽자구!
인문학과 대학 강의
언니에게 들뢰즈 책이 한 권 있다. 이러쿵 저러쿵 떠들다가, 기호학 이야기가 나왔다.
어렴풋이 생각난다. 여성문학론. 시니피앙과 시니피에. 기표와 기의.
거지 깽깽이같은 커리큘럼... 여성문학론은 3학년 전공 수업이었다. 그리고 그 때 갑자기 프로이트, 라깡, 리비에르, 푸코가 튀어나왔다. 학부 때는 뭘 했지? 기억나는 것은 각 전공 입문 수업과, 회화 · 작문 · 리스닝 같은 영어 수업. 아, 읽기 수업이 있었지. 그렇지만 그건 맛보기였잖아.
개론 수업도 없이 진행되었던 문학 비평 수업들. 서양 문학과 문화를 공부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. 사실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영어 실력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. 그런데 철학은 필수 과목이 아니다. 공부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알려주지도 않는다. 결론적으로 3학년에서 알아서 그 공백을 메워야했다. 어려워 - 재미없어 - 공부 안해 - 교수들의 비웃음으로 이어지는 악순환.
라깡, 들뢰즈, 데리다, 벤야민... 아마 한 번쯤은 학부 수업에서 언급하기는 했을 것이다. 그러나 그 중 몇 명이나 제대로 다루었나? 기껏해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한 편씩 읽은 것이 전부였지. 아, 데리다와 벤야민 정도는 한 시간씩 했었던 것 같기도?
뭐 물론 대학은 혼자 공부하는 곳이다.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공부 할 놈은 공부하고 책 찾아 읽을 놈을 찾아 읽었을 것이다. 그렇지만 서양 지성계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입문 수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. 문학 전공 희망자라면 이 정도는 알고있어야 올라가서 고생 안한다는 협박을 곁들어서.
......
이런 생각을 대학 다닐 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. 아이고.